[ 요약 ]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행태를 말하며 종종 소수 집권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하여 다수의 일반인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반대되는 개념은 엘리트주의(Elitism)이다.
[본문]
대중주의라고도 하며, 인기영합주의·대중영합주의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일반 대중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고 동원시켜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소수의 지배집단이 통치하는 엘리트주의와 대립적인 의미이다.
포퓰리즘의 어원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파퓰리스트당(Populist Party), 즉 인민당(People's Party)에 기인한다. 파퓰리스트당은 당시 미국의 양대 정당으로서 1792년에 창당된 미국민주당(Democratic Party)과 1854년에 결성된 미국공화당(Republican Party)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과 노조의 지지를 목표로 경제적 합리성을 도외시한 과격한 정책을 내세웠다.
통상 정치 지도자는 반대편 정치세력 또는 정치엘리트들의 저항에 직면할 때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고, 그 대중적 지지를 권력유지의 기반으로 삼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노동대중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이 대표적 포퓰리즘이다.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특정 지도자나 독재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정치행태이다.
포퓰리즘의 근본 요소는 개혁을 내세우는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적 편의주의(便宜主義)나 기회주의(機會主義)이다. 예를 들면 선거를 치를 때 유권자들에게 경제논리에 어긋나는 선심 정책을 남발하는 일이 전형적이다.
포퓰리즘을 이끌어가는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과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고 겉모양만 보기 좋은 개혁을 내세운다. 민중 또는 대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인기 영합주의로 빠지기 쉽고, 합리적인 정치·사회 개혁보다 집권세력의 권력유지에 악용되기도 한다.
특권 엘리트 계층과의 투쟁에서 일반 대중의 힘과 권리를 대변하는 정치적인 독트린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포퓰리즘의 개념은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적용된다.
출처 참조: http://100.naver.com/100.nhn?docid=776747
◈ 포퓰리즘 (populism) ▲
1.의 미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보여주는 정치행태를 말한다.‘민중주의'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을 위한다기보다는 ‘민중’을 빙자하거나 사칭한 엉터리 이데올로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을 주도하는 정치지도자들이 개혁을 내세우긴 하지만 권력을 획득하고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내세우는 허울좋은 슬로건에 불과하다. 원칙과 일관성이 없이 ‘정의’니 ‘제3의 길’이니 하며 화려한 수사(修辭)를 동원하므로. 정치적 편의주의, 기회주의적인 이데올르기라고 할 수 있다.
2.특 징
(1)지나친 인기 영합주의
산업화의 물결 속에 수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계가 걱정이었다. 이런 한계적 상황에 내몰린 처지에서 길게 볼 여유가 없었다.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혁하는 일보다는 즉각적으로 실리를 얻는 것이 더 급했다.
(2)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저소득 계층의 임금을 올려주고 복지를 늘리는 등 각종 물량공세를 폈다.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혜택을 보고자 했으므로 아무도 손해보지 않는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게 하는 것을 지향하였다.
3.결 과
(1)국고 및 재정 압박
에비타는 손을 벌리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푼 결과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으나 지나친 분배위주의 정책으로 막대한 재정적자를 초래하고 실질임금의 저하를 가져왔다.
(2)정치인들로부터 기업인,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나라살림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무책임하고 기회주의적인, 그리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세태를 초래하였다.
(3)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저성장의 악순환 초래
출처 http://sigma101.nazip.net/menu_5_data/politi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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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포퓰리즘과 신포퓰리즘 관련 글]
정권 경제색깔 달라져도 '포퓰리즘 뿌리'는 동일
[한국일보 2004-08-17 17:19]
포퓰리즘의 역사는 반세기를 훨씬 넘고 아직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의 많은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정치현상이다. 그러나 포퓰리즘만큼 작위적이고 혼란스러운 용어도 없다.국내외 언론은 남미 정부들이 시장 친화적이지 않은 정책을 추진하면 이를가리켜 흔히 포퓰리즘으로 지칭하여 왔다. 한국 언론은 곧잘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포퓰리즘으로 규정하였다.
포퓰리즘은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0년 대를 기점으로 변신한다.90년 대 이전과 이후의 포퓰리즘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경제정책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정치적으로 두 가지 모두 기성정치에 반대하여서민층 지지를 통해 집권한다.
그러나 고전적 포퓰리즘이 분배를 중시했다면 세계화 이후의 현상인 신포퓰리즘은 시장친화 정책을 추진한다. 2003년 출범한 아르헨티나의 키르히네르의 정부는 지나친 시장정책에 대한 반동으로 집권했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브랜드는 탱고와 포퓰리즘의 원조인 페로니즘이다. 탱고와 페로니즘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같은 부둣가에서 시작되고 번성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탱고는 관능미와 고도의 절제를 동시에 보여주는 춤이다. 탱고는 오늘날의그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쪽 부둣가 창녀들이 하역노동자들을 상대로 추던 춤이었다. 이 부둣가 지명이 오늘날 탱고의 관광지로 유명한 라 보카이다.
페로니즘 또한 라 보카에서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페로니즘은 1943년으로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후안 도밍고 페론은 육군 대령으로 군사 쿠테타에참여하여 한직인 노동부 장관을 맡았다. 페론은 노동부 장관을 하면서 노조와 밀접해졌고 급기야는 노조를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46년 대선에서 페론은 대통령직에 도전하였다. 페론은 라 보카 등 노동자 밀집거주지역의 대규모 지지에 힘입어 54%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조만이 아니라 산업가 세력도 페론을 지지했다. 이들은 페론이 전통적지배세력인 농업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것을 희망했다.
페론은 집권 시 친노동정책을 통해 인기를 누렸다. 1989년 페론당 대권후보 메넴의 당선이 말해주듯 ‘페론 향수’는 언제라도 페론주의가 재등장할 정도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남미에서 포퓰리즘을 가능하게 한 것은 남미 특유의 과두제 정치이다. 봉건영주 격에 해당하는 까우디요를 정점으로 하는지방 토호는 아직까지도 남미 곳곳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까우디요 권력의 전횡은 남미 사람들의 가슴에 정치와 정치엘리트에 대한 불신과반감을 심어 놓았다.
정치인에 대한 반감은 정당을 비롯한 정치제도 전체에 대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나아가, 20세기 이후의 지속적 성장에도 성장의 과실은 과두제와 일부 산업가들이 독식하여 다수의 불만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이었다.
포퓰리즘은 바로 반정치의 정서를 기초로 한다. 어떤 점에서 포퓰리즘은남미 최초의 ‘참여정치’이다. 포퓰리즘은 제도권 정치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염증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넓혔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여를 했다. 또한 포퓰리즘은 대외관계에서는 자주적 외교정책이나 또는 강력한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포퓰리즘은 경제정책에서는 서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포퓰리즘은 노조를 포함한 하층 및 서민을 지지기반으로 한다. 실제로 페론 집권 (1946~55) 10년 동안, 노동계급에 유리한 경제정책이 실시되어 여러 면에서 노동자의 삶의 질은 향상되었다. 반면 중산층에게는 고통의 10년이었다. 중산층 이상이 겪은 고통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기보다 심리적 그리고 문화적 충격에서 비롯됐다.
포퓰리즘은 시대상황의 변화에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 포퓰리즘은 자유주의 정부(1983~89)의 등장과 더불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89년 대선에서 페론당 카를로스 메넴의 대통령 당선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기득권층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메넴은 전통적 의미의 페론주의자가 아니었다. 메넴은 페론주의 전통으로부터 U턴 했다. 그는 포퓰리즘에 신자유주의의 내용을 채워 미국의 찬사를 받았다. 메넴 대통령은 민영화를 적극추진하고 수입대체산업 포기를 포함하여 보호무역을 폐기하는 등 시장 친화적 정책을 강력히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 지지세력인 정규직 노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메넴의 러브콜은 비정규직과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에게 향했다. 이제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이 페로니즘의 전략적 파트너가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네오 포퓰리즘에서 볼 때 기존 노조 또한 기득권층에속한다. 그러나 네오 포퓰리즘의 정치동원전략 자체는 불변이다. 포퓰리즘정치는 정치 자체를 혐오함으로써 구정치를 발본색원한다는 개혁을 명분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기존의 모든 정치를 부정하는 ‘반정치의 정치’를내세운다.
포퓰리즘은 개혁운동을 앞세워 대의민주주의와 그 장치인 정당을 부인하는것이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정당정치는 칠레에 비해 제도화하지 못했다.이점에서 현직 아르헨티나 대통령 키르히네르 또한 포퓰리즘과 무관치 않다. 그 역시 남부의 과거의 까우디요에 버금가는 권위주의 정치인이다. 2003년 대선 직전까지 그는 중앙 정계의 경험이 없는 남부 변방의 깨끗한페론주의자였다.
누구도 키르히네르가 메넴을 누르리라고 예상치 않았다. 무명의 키르히네르가 메넴을 꺽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메넴 시절 이후 만연된 부패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반작용이다.
당선 후 국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깨달은 그는 개혁의 선봉을 자임했다. 외채 상환을 재촉하던 IMF에 대해서는 재협상의 ‘민족주의’ 노선을강조하여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키르히네르는 부패정치의 타파가 제1의개혁과제임을 강조했다. 키르히네르의 이러한 반부패 구호는 기성 정치는곧 부패라는 일반 시민들의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처럼 키르히네르 대통령은 ‘반정치의 정치’에 의존한다. 그는 선거과정에서 페론당의 정통파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 출신이자 당시 대통령대행이었던 두할데의 지원을 받았다.키르히네르는 당선 후 대법원을 개혁하고 부패척결을 강조했다. 두할데 등페론당 우파를 부패 정치인으로 공격함으로써 높은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스스로를 페로니즘 좌파라고 자리매김하는 키르히네르의 정치는 초기 페론을 닮았다.앞으로 키르히네르 개혁의 성공여부는 경제에 달려 있다. 두할데의 평가절하정책 덕분에 경제는 취임 첫해 11%나 성장하는 호황을 누리지만 세계경제가 나빠지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 연구위원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11&dir_id=110108&eid=gRnLfHL87WiFkypHJVERI3b1DOvUTZ7q&qb=xvfHvbiuwfI=&pid=fsKsPsoQZTlssvwHJ80sss--351016&sid=rruF9gYc@kcAAB4kUBcAAA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