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방송 겸영’을 허용하는 법안을 놓고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있고 한나라당은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전략을 짜고 있다. 여기에 엠비씨를 중심으로 한 방송사의 노조들은 결사항전에 나섰다. 신문사들은 두 패로 갈라져 있다. 겸영을 찬성하는 조중동 등 보수 언론과 그것을 반대하는 한겨레 등 진보 계열 언론이 여론을 쟁탈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겸영’이 도대체 뭐기에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것일까. 그 법안의 골자는 신문사가 방송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의 도입이다. 신문사가 방송을 소유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싸움이란 대치의 형국에 이르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구호들은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주관적인 견해들과 과장법들이 난무하게 되어 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본질을 들여다 보면 오히려 간명한 문제일 수도 있다.
현재 TV방송은 뉴스 영역과 엔터테인먼트 영역을 가지고 있다. 뉴스와 엔터테인먼트가 결합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기도 한다. 신문이 TV를 갖고싶어하는 까닭은 대개 세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어젠더 세팅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뉴스 편집’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움직임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 뉴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990년대는 TV와 영향력을 분점하는 시대였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문이 TV와 인터넷에 영향력을 크게 잠식당해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어젠더 세팅이란 간단히 말하면 ‘편집된 뉴스’를 대중의 머리 속에 침투시키는 것이다. 그냥 뉴스가 아니라 ‘편집된 뉴스’라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즉 신문사나 방송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뉴스를 골라내서 강조하고 거기에 견해를 넣어 실어보내는 게 ‘편집된’의 의미이다. ‘편집된’에는 대개 세 가지 주요한 기능이 포함된다. 첫째는 기사를 싣느냐 싣지 않느냐 하는 선택이다. 둘째는 크게 싣느냐 작게 싣느냐의 선택이다. 셋째는 어떤 관점으로 싣느냐의 결정이다. 이런 것들이 왜 중요한가. 그 뉴스를 접촉하는 대중의 생각과 관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젠더는 신문이나 방송이 대중의 ‘머리’ 속을 점령하려는 기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TV 뉴스를 생각해보자. 저녁 9시 방송이 국민의 머리 속에 들어가 앉는 정도는 신문에 비할 바가 아닐 만큼 강력하다. 신문은 뉴스를 음미하고 성찰하는 기능이 부가되어 있고, 방송 뉴스는 여과없이 흡수하는 측면이 강하다. 미디어의 특징 때문에 그렇다. 방송 뉴스는 ‘어젠더’를 형성하기에 아주 유리하다. 신문은 미디어의 환경 변화로 열세에 처한 ‘어젠더 세팅’ 능력을 획기적으로 키울 필요가 생겼다.
두 번째, 신문이 TV를 갖고싶어하는 까닭은 그것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 영역은 스타와 패션과 문화와 삶을 만들어낸다. 대중과 밀착해 있기에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도 수월하며 광고라는 돈줄을 잡기에도 아직까지는 비교적 유리하다. 현재 국내에서의 신문은 ‘경제 논리’로 볼 때 별로 매력이 없는 기업이다.
세 번째, 신문이 TV에 대해 꿈꾸는 것은 미래의 가치이다. 지금 미디어 산업은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의 변화에 직면해있는 상황이다. TV 그 자체로 보자면, 이미 일정한 한계가 보이는 산업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새로운 기술과 결합할 때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인터넷이라는 장(場)은 그런 비전을 키워주었고, 휴대폰이 기폭제가 되고 있는 유비쿼터스 미디어에도 TV콘텐츠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신문과 TV가 지니고 있는 다채로운 콘텐츠를 확보하고 그것을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무대에서 벌일 미디어전쟁에 대비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핵심은 ‘어젠더 세팅’이다. TV의 기능 중에서 뉴스 부문을 결정하는 주체가 바뀌는 것이, 이번 갈등의 핵심이다. 역대 정권들은 권력을 장악함과 동시에 TV방송을 휘어잡았다. ‘땡전뉴스’는 정권과 TV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강렬한 풍자어이다. 1980년대 우리는 가족들이 모여앉아, 시간을 알리는 뚜뚜뚜뚜가 끝나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뉴스를 시청했다. 이것이 땡전뉴스다. 권력자를 압도적인 어젠더 세터로 만드는 TV의 기획들은 늘 영향력이 확실해보였고 정권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모든 국민들은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동거하는 느낌을 가질 만큼 의식과 무의식을 점령당한 경험을 했다.
그렇다면 이명박정권은 왜 이 좋은 ‘확성기’인 TV를 전두환씨처럼 휘어잡지 않고, 민간에 넘기려는 것일까. 이것을 정밀하게 이해하는 것이 문제를 읽는 눈이다. 오늘 아침(2008년 12월 27일) 신문에는 ‘광우병 공포가 조작되고 과장되었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보도되고 있다. 광우병 공포는 지난 봄과 여름의 걷잡을 수 없었던 촛불시위를 이끌어낸 대중의 내면을 건드린 것이었다. 광우병에 관한 정보와 견해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엠비씨의 피디수첩이다. 방송은 민심을 형성했고 사람들은 시청과 광화문 일대로 몰려나오게 하는데 성공했다. 방송의 어젠더 세팅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조중동은 광우병의 위험과 관련해 비판적인 의견을 지속적으로 내다가 신문사 건물로 몰려든 대중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조중동의 견해는 거의 어젠더를 만들어내지 못했거나 잠복한 어젠더를 만들어내는데에 그쳤고, 엠비씨의 견해를 수용한 여론은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정부는 초기에 광우병 여론에 대해 다소 가볍게 생각했다가, 통상교섭 상의 실수들이 밝혀지면서 더할 나위없는 곤경에 처했다. 쇠고기 문제는 정권 초기에 권력 근간을 흔들듯한 기세로 여론을 달궜다. TV가 촉발한 어젠더는, 다른 정치적 세력의 선동없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나와 정부에게 의견을 보였다는 점에서 1980년대 민주화 시위의 추억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엠비씨의 매체력이 있었다.
TV는 노무현 정권 때의 ‘황우석 파동’때에도 위력을 발휘했다. 황우석을 국민과학자로 만든 것은 애국주의 보도 관행으로 그를 비중있게 실어준 많은 언론들의 힘이었다. 그런데 엠비씨는 당시의 ‘우상’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강력한 ‘뉴스 메시지’를 내보냈다. 세계적인 동물복제 역량을 가진 우리의 과학자는 논문의 증거물조차도 조작하는 ‘사기꾼’으로 하루 아침에 바뀌는, 가치의 전복을 대중은 경험했다. 이후, 사회는 어마어마한 논란에 휩싸였다. 그런 급전직하를 받아들이지 않는 신념의 잔당(殘黨)들은 사태를 황우석 박해로 이해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내용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방송이 유표한, 뉴스에 대한 관점들은 대중을 힘있게 움직였다. 물론 엠비씨의 보도가 위력을 발휘한 것은 단순히 TV의 힘이라기 보다는 그 보도 내용이 국민의 관심을 붙잡을 만큼 강력하고 획기적인 것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채널의 힘이 그것을 뒷받침해준 것에는 변함이 없다.
엠비씨가 이명박 정권을 몹시 불편하게 할 만큼 촛불여론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방송이 권력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TV의 뉴스 편집이 외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언론 자유를 위해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송 뉴스의 견해를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직접적인 통제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TV의 핵심 뉴스 편집자들은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인사로 채워졌다. 뉴스 편집자들의 견해는 어젠더의 관점을 생산해낸다. 사람이 바뀌면 미디어의 견해가 바뀐다. 김대중 정권 시절 권력이 조중동의 사주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던 때가 있었다. 사주가 사라지고 뉴스 편집자들이 자율적으로 신문을 만들어낼 경우, 뉴스 편집자들만 적절히 배치하면 신문의 논조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의 ‘진보’ 정권은 조중동을 바꾸는데는 실패했지만, 방송 뉴스의 논조를 바꾸는데는 일정 부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정권은 정권 자체에 비호의적인 ‘진보적인 엠비씨’를 바꾸기 위해 두 가지 선택지를 고려했을 것이다. 하나는 지난 정권의 방식 대로, 방송사 내부의 인사를 통해 ‘보수적인’ 뉴스 편집자들을 심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적인 사주에게 넘겨서 운영하게 하는 것이다. 전자가 자연스럽겠지만, 그것은 정권이 레임덕 상태에 이르거나 교체될 경우엔 다시 ‘견해’를 바꾸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어떤 정권이 되더라도 안정적인 ‘보수’ 견해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사주가 보수적이고 신문이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촛불시위 때와 같이 정권이 당혹스런 상황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정책을 속내만으로 짚을 순 없다. 거기엔 대의명분과 비전이 중요하기도 하다. 방송사를 민간이 운영하는 것이야 말로 ‘언론 민주화’를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물론 언론이 ‘자본’의 문제를 극복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할 때 그 ‘언론 민주화’는 자본의 이익이나 자본과 결탁한 정권의 이익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또 TV가 나아가야할 미래 미디어의 비전을 감안할 때 현재의 경영 방식을 유지하는 것은 유리하지 않다.
‘겸영’ 기류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의 내면을 지닌다. 첫째는 방송 속에 어렵사리 뿌리 내려놓은 ‘진보’의 색깔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민주당과 한겨레신문은 ‘진지전’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둘째는 보수 언론의 공룡화에 대한 경계이다. 안그래도 신문시장을 과점하는 조중동이 방송을 가진다면, 현재의 마이너 신문들은 더욱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논조들이 경쟁하며 생존하는 미디어 환경을 위협할 수 밖에 없다. 셋째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기득권’과 ‘생존의 기반’을 놓지 않으려는 조직원의 반발이다. 현재 이런 문제들이 뒤섞여, 타당한 견해들과 그렇지 않은 주장들이 뒤섞여서 반대의 목소리를 만들고 있다. ‘겸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반대자들의 내면을 뒤집어 보면 된다.
나는 첫 번째 생각, ‘방송사에 뿌리내린 진보’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권이 이것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언론에 대해 제대로 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방송사가 정권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오히려 이 비판의 환경을 지켜주기 위해 일정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두 번째의 견해에 대해서는 나는 생각이 다르다. 판매의 기회가 공정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관건이겠지만, 신문은 독자 수만큼 팔린다. 돈을 내고도 보고싶은 사람들이 보는 것이다. 여론이 시장이라면 여론을 제대로 담은 것들이 팔릴 수 밖에 없다. 신문을 구독할 의사가 있으나 구매할 능력이 없는 계층이 주독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문제를 여론 형평성의 차원에서 제기하여 지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시장 자체의 양상을 무시하고 정부의 ‘보호’나 세금의 ‘보조’에 의지하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신문은 존재해선 안된다. 진보적인 마이너 신문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은 ‘진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문을 만드는 방식이 뒤떨어지기 때문인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뉴스의 품질에도 ‘자본’이 필요하다. 기자인력을 고급화하고 그 숫자를 많이 확보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따라서 신문사가 투자 가치가 있는 기업이 되는 것은, 뉴스의 품질을 올리고 미디어의 수준을 향상시키는데도 필요하다. 세 번째 견해에 대해서는 가슴이 아프지만 할 말이 없다.
신문사가 TV를 경영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막는 우행이다. 그보다는 그것에 감춰져 있는 욕망과 문제들을 들추어 내서 사전에 제어장치를 달아줌으로써, 그 변화가 우리 사회에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이성적이다. 첫째는 TV의 어젠더 세팅에 권력과 재벌, 그리고 언론 사주가 개입하는 것을 감시하고 봉쇄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엠비씨 속에 ‘다양한 의견’을 영향력 있게 둘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방송사 내부에 ‘의사 결정의 자유’에 관한 전통들이 수립되도록 체질화하는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방송 노조는 그런 기능을 확보하는 역량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 둘째는 ‘방송 투자’를 확대해서 국제적인 미디어 역량을 갖추는 기회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 돈은 격동기의 기술들을 미디어에 접목시켜, TV의 콘텐츠 품질을 높일 것이다. 셋째 정권은 언론에 대한 중립주의와 비관여의 원칙을 천명해야 한다. 설령 또다른 촛불이 켜져서 존립이 흔들린다 해도, 그 어젠더를 생산한 언론사를 누를 생각을 해선 안된다. 그 어젠더의 오류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다른 문제이다. /빈섬.